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종(고려 제3대) (문단 편집) == 평가 == 혜종이 붕어한 뒤 그의 세력이었던 박술희와 왕규까지 연달아 제압하고 임금이 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혜종과 똑같이 동생 때문에 환장하다가 허망하게 요절하는 비운을 맞고야 말았다. 보위에 오르자마자 동생인 왕소가 적잖이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었다. 그를 제압하자니 기반이 만만치 않아 그조차 쉽지 않았던 것. 게다가 왕규까지 반란을 일으키고 앉았으니. 결국 정종이 여러 반란을 때려잡고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박살내려고 별의별 짓을 다했으나, 허망하게 요절하면서 광종이 그 덕을 봤다. 정종의 후견인이던 [[왕식렴]]도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으니 광종은 참 덕을 잘 본 듯하다. 그래서인지 광종에게 비판적이었던 [[최승로]]는 비슷하게 피의 숙청을 한 정종에게는 우호적이었다. 아래는 정종에 대한 최승로의 평가다. >정종께서는 왕자였을 때부터 훌륭한 명성이 있었습니다. 혜종께서 병석에 누워 오래 동안 회복되지 않자 재신 왕규 등이 몰래 모의하여 왕실을 넘보았습니다. 정종께서 이를 먼저 알아차리시고 은밀히 서도(西都)의 충성스럽고 절의가 있는 장군(왕식렴)과 함께 계책을 정하여 대비하셨습니다. 내란이 일어나려 하자 호위하는 군사가 많이 도착했으므로 간악한 계략은 실패로 돌아가고 흉악한 무리들은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는 비록 천명에 따랐다고는 하나 사람의 계책도 있었으니 어찌 뛰어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태조로부터 지금까지 38년 간 왕위가 끊어지지 않았던 것은 역시 정종의 힘이었습니다. > >정종께서는 임금의 형제로 왕위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노력하여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구하셨습니다. 때로는 촛불을 밝혀들고 조정의 선비를 접견하셨고, 또 어떤 때는 정사에 바빠서 늦게 식사하면서 모든 정사를 듣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즉위한 초기에 사람들이 모두 서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참을 그릇되게 믿게 되자 도읍을 옮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게다가 천성이 굳세시어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고, 급박하게 백성들을 징발하여 역사(役事)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니, 비록 임금의 생각이 옳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은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원망과 비방이 이로 인해 일어났고 재난이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재빨리 응하여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지도 못하고 임금의 자리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최승로는 고려 왕씨가 계보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힘은 광종이 아니라 정종의 공이라고 평하고 있다. 비록 무리한 서경 천도를 벌여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고 끝내 요절하기는 했지만 보통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